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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의속삭임 (83)
본과3학년 2학기 호흡기내과2 : 인상주의

#1 긴 실습이 끝나고 시험기간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돌았던 내과의 교수님들은 환자들을 기가 막히게 어르고 달래며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때로는 그들에게 털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둥 병원을 시장의 한복판처럼 만들면서 사소한 인사들로 웃음을 주기도 했다. 프랑스어 어원으로 상호신뢰를 의미하는 단어 Rapport, 흔하게 의학에서 라뽀라고 말하는 단어는 의사-환자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 마지막 실습에 이르러서 정말 회진의 귀재들을 그침없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M 교수님의 칭얼거림, L 교수님의 부드러움, J 교수님의 수다스러움을 한데 모으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라뽀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농담을 했다. 회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기다림은 덤이겠지만 아무렴. 그 틈새 속에서 보이는 관계의 쌓아올림은..

자판의속삭임 2018. 12. 21. 03:07
본과3학년 2학기 호흡기내과 : 귀로

#1 자취생활을 하다보면 늘 본가가 그립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막연하게 독립한 생활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조금은 있었다. 내 경우에는 가사노동, 집안일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나의 몫을 받아왔기 때문에 잔뼈가 굵은 편이라는 자만아닌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고 지나치게 꼼꼼한 피를 이어받아 집을 나가서도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현관 문턱을 벗어나 육첩방의 외딴 방 안에 들어오면 환상은 낱낱이 깨져 차가운 바닥에 흩어지고 만다. 시험기간이나 학교의 일정이 턱 밑으로 차고 들면 더욱 그렇다. 가정은 일순간 지진이나 재해로 토사가 들이닥치듯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물에 젖는 종이의 꼴로 알게 모르게 흐물거리게 된다. 비단 나의 자취가 아닌 삶 또한 그런 흐물거림과 다림질의 연속이었는지..

자판의속삭임 2018. 11. 19. 00:48
본과3학년 2학기 소화기내과2 : 주간선데이

$1 최근에 한 PC방에서 있었던 벌어진 사건이 사회적인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강서구에서 벌어진 사건은 응급차를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인 이대병원으로 향하게했고, 세상의 일은 정말 어떻게 풀리는지 알 수 없게 남궁인 선생님이 해당 환자를 응급실에서 받았다. 사건시간이 저녁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신의 근무중에 환자가 응급으로 들어왔음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피해자에 대한 글을 썼고, 어쨌거나 청와대의 심신미약자에 대한 국민청원은 역대 최고의 청원수를 기록했다. 조현병 환자들의 법치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이 지긋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나는 무척이나 심란해졌다. $2 남궁인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군의관들의 논산 훈련소에 대한 재미지게 풀어낸 썰을 읽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내..

자판의속삭임 2018. 10. 29. 01:04
본과3학년 2학기 소화기내과 : 눈동자 속의 미로

#1 외래에 멍하게 앉아 있다가 문뜩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 초창기 시절 나는 도서관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서가들을 오가면서 책등에 씌워진 번호들을 읽고 작가를 추려 그들과 인사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보존서가에 들어가 빙글빙글 돌리는 이동서가를 돌리는 일은 지금 떠올려도 굉장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일했던 곳은 서가의 책 냄새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관리실 쪽이었다. 내가 주로 했던 일은 안내실에 앉아 열람실의 좌석과 폐쇄회로 카메라를 관리하는 명목하에 그 동네의 얼굴마담들인 도서관에 출석도장을 찍으러오는 사람들을 늘어지게 상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 공원에서 신선내기 장기를 두다가 매점을 찾아 들어오는 어르신들, 꿈과 희망을 쥐고 매일 같이 ..

자판의속삭임 2018. 10. 17. 16:16
본과3학년 2학기 종양혈액내과 : 삶과 죽음2

#1 면담을 계획하고 있던 환자가 돌아가셨다. 일정의 바쁨으로 내일 찾아뵈어야지 하는 하루의 시간이 지나자 환자는 강 건너로 넘어가버렸다. 환자의 병력청취를 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얇은 귀는 타인의 죽음에 쉽게 휩쓸렸을 것이 분명하기에. 의학에서는 환자의 죽음을 expire라고 표현한다. 원래 '죽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기간, 일정, 생이 꽉 채워져 끝난다는 '만기'라는 뜻을 먼저 떠올리는 동기들은 expire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사용을 거부하기도 한다. '우리말에는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 서거했다, 운명을 달리하셨다' 하는 식의 표현이 들어간 시가 있었던 것 같다. 영어도 die, passed away, expire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2 연..

자판의속삭임 2018. 9. 22. 02:38
본과3학년 2학기 순환기내과 : 도전과 젊음

#1방학이 끝날 무렵 하나의 작은 도전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도전을 할 때의 이상한 습관 같은 것이 있다. 있는 힘껏 공을 던지고 나서 원하는 만큼 날아가지 않아도 나는 내심 '별 수 없지.' '그렇게 될 줄 알았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패배주의나 열등감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이 나는 던지는 것 자체는 퍽 좋아한다는 점이다. 던진 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일종의 체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진인사대천명을 삐딱하게 읽은 느낌일까.늘 집요하게 끝까지 승부욕, 드러내 자신감을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곁불을 쬐고, 비참하게 바닥에서 구르고 흙이 튀어 옷이 젖을지라도 마지막에 공을 잡아 터치다운을 해내는 사람들. 양반인 척 고상한 척 하면서 등..

자판의속삭임 2018. 8. 30. 23:03
본과3학년 1학기 산부인과2 :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1이러니저러니해도 산부인과는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과 가운데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많은데 인원이 부족하다면 남은 사람들이 그 일을 나누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실습학생에게도 일이 조금 떨어져 내려온다. 짐처럼 부담일 수도 있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에 숨어 의사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채 병원생활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외래로 환자가 처음 찾아오게 되면 무슨 일로 병원을 오게 되었는지 기존에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던게 어땠는지 출산력은 어땠는지 등등의 간단한 질문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초진이라고 하는데 산부인과는 학생이 초진을 통해서 환자를 직접 마주하고 몇 분, 혹은 몇 십 분의 시간을 들여서 문진을 해볼 수 있는 귀한 경험..

자판의속삭임 2018. 6. 24. 02:49
본과3학년 1학기 산부인과1 : 표현주의

#1비가 흐드러지게 떨어지자 비옷을 입고 일기장을 펼치며 집 밖을 나섰다. 커다란 우산까지 챙겨쓰고 비에 젖을 준비만반으로 빗속에 있을 때 늘 하는 고민이 있다. 이어폰으로 귀를 덮어 음악을 들을까, 귀를 열고 내리는 빗소리를 들을까. 최치원은 듣기 싫은 속세의 시비성을 굽이치는 물소리로 틀어막고 가야산 안에서 자신만의 구름 위 삶을 택했다. 고르려고 하면 비가 내리지 않아도 나를 젖게 만들어 줄 음악을 열 손가락 가득 고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절과 날씨까지 고려했을 때 마주하기 어려운 비 내리는 수목원 속의 물소리를 두고 음악을 틀어 고막을 막는 것은 외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최치원스럽게 말하자면 내가 고르는 음악들이야말로 시비성이 되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순간은 매 순간이 ..

자판의속삭임 2018. 5. 27.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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